[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사목자들의 이중생활은 교회의 상처”


연민, 가까움, 일관성. 이 세 단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에서 목자와 그의 “권위”를 특징짓는 표현이었다. 교황은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신” 예수님을 전하는 이날(1월 9일) 마르코 복음(1,21-28)을 해설하면서, “새로운 가르침”에 대한 내용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새로움”은, 바로 성부께로부터 받았던 “권위의 선물”이다. 교황은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이 “진리를 말했었지만”, 사람들은 “다른 것을 생각했다”는데 주목했다. 왜냐하면 율법학자들이 말했던 내용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가르침은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교단”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놀라움을 야기”시켰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왜냐하면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가까움에 있기 때문이다. 교황은 예수님께서 문제들, 고통들, 죄들을 이해하시면서 “사람들에게 다가가셨기 때문에, 권위를 지니셨다”고 설명했다.

“가까웠기 때문에 이해하셨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셨고, 치유하셨으며, 가르치셨습니다. 한 사람의 목자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 혹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신 권위가 한 사람의 목자를 일깨우는 것은 ‘가까움’입니다. 곧,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의 가까움(기도하지 않는 사목자, 하느님을 찾지 않는 사목자는 자기 역할을 상실합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가까움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떨어진 목자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지 못합니다. 가까움은, (방금 말한) 이 두 가지 가까움입니다. 이것이 목자의 기름부음입니다. 목자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선물에 감동합니다. 또한 기도 안에서 목자는 사람들의 죄들, 문제들, 질병들에 마음이 움직일 수 있습니다. (가까움은) 목자를 감동시킵니다.”

교황은 율법학자들이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고,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기” 때문에, 마음을 움직이는 고유한 “능력”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이어 교황은 사목자가 이와 같은 가까움을 상실했을 때 “불일치 속에서 삶”을 마치게 된다고 경고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있어서 명확하십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들은 진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이중생활입니다. 이중생활을 하는 사목자들을 보는 것은 추합니다. 이중생활을 하는 목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상처입니다. 권위를 상실하고 병든 목자들은 이러한 이중생활을 계속합니다. 이중생활을 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습니다. 어디까지나 이중적인 생활입니다. (...)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주 강경하십니다. 그들의 말은 듣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율법학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 겉은, 아주 아름다운 가르침입니다. 그렇지만 속은, 썩었습니다. 이것이 기도로 하느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연민으로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 목자의 최후입니다.”

교황은 제1독서를 인용하며, 주님께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한나의 모습과 한나를 술 취한 여자로 생각했던 사제, 곧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감을 상실하고 약해진, 매우 늙은 엘리” 사제의 모습을 다시 제시했다. 한나는 단지 입술만 움직이면서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한나는 엘리 사제에게 “마음이 괴롭다”며, 자신의 “고통”과 “근심”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 엘리 사제는 그녀에게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당신이 드린 청을 들어주실 것이오”라고 말할 정도로, “그 마음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교황은 여기서 엘리 사제의 마음에서 “축복과 예언”이 나왔고, 나중에 안나가 사무엘을 낳았기 때문에, 엘리는 자신이 “(처음에) 잘못했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저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 사람들로부터 떨어진 삶을 살았던 사목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항상 가능성이 있습니다. 엘리 사제에게는, 한 여인을 바라보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그녀의 말을 듣고, 축복하고, 예언하기 위한 권위를 회복하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 예언은 이뤄졌고, 그 여인에게는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권위, 그 권위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오로지 그분으로부터 주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권위를 당신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말할 때 권위는, 하느님과 사람들과의 가까움에서 옵니다. 항상 이 둘은 함께입니다. 권위는 이중생활이 아닙니다. 권위는 일관성입니다. 이것이 권위입니다. 그리고 만일 어떤 사제가 권위를 잃더라도, 엘리의 경우처럼, 적어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가까이 다가가고, 권위와 예언을 회복할 시간은 항상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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